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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소음 속, 마음의 쉼을 얻는 법륭사
도시의 소음 속,
마음의 쉼을 얻는 법륭사
나를 비우고, 지혜로 채우는 깨달음과 성찰의 공간
나를 비우고, 지혜로 채우는
깨달음과 성찰의 공간
고요한 산사의 바람이
마음의 먼지를 털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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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륭사 소개

수마제전

법륭사에서 중심이 되는 법당

법사에서 중심이 되는 법당으로 고요한 곳, 조용한 곳, 편안한 곳 안정된 곳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건물 사찰 전통방식으로 지어졌으며 본존불이 석가모니불, 협시불로는 지장보살님과 관세음보살님이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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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마제전

설법전

불법을 가르치는 법당

불법을 가르치는 법당으로 스님들이 법문을 가르치는 장소이자 대중이 기도수행을 할 수 있는 누각이다.
설법전에는 아미타불, 석가모니불, 약사여래불을 모시었고,
관세음보살과 16나한 탱화를 봉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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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법전

삼성각

법륭사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

칠성, 산신, 독성을 모신 전각이다 법륭사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으로 작고 따뜻한 기도 공간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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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각

범종루

범종, 법고, 목어, 운판, 불전 사물이 있는 누각

범종, 법고, 목어, 운판, 불전 사물이 있는 누각이다.
이를 불전사물이라 하는데, 그 중 범종은 지옥중생을 구제하는 것이다.
운판은 허공계 중생을 구제하고, 목어는 물고기, 법고는 가축들을 제도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불전사물은 대중들의 불심을 키우는데 도움을 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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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종루

약사여래불

약사유리광여래불

이라고도 하며, 열 두가지 서원을 세워 중생의 질병을 구제하고, 수명을 연장하도록 인도해주신다.
또한 재앙을 소멸하여 의식만족을 이루어 주시고, 중생을 바른길로 인도하여 깨달음을 얻게 하는 부처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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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여래불

동자불, 석가모니불, 마애석불

동자불, 석가모니불, 마애석불

동자불의 모습은 아이들이 부처님을 친근하게 접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마애불은 편안하고 자애로운 어머니의 미소를 머금고 오가는 신도들을 굽어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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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자불, 석가모니불, 마애석불

방하

신도들의 휴게공간

근심걱정을 일으키는 집착과 여러 인연을 놓아버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따뜻하고 시원한 음료와 함께 모두 편안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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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하

창건연기문

을 치료는 본래 가로 A또 -의 호이었던 것을 매입하여
12530년 음력 7월12일 을 앞두고 건물일체를 1조하여 비하였다.
人I法堂17受 三聖閣5坪 2AI35坪 盟 10坪 韓屋大門
그리고 1&P9으로 도량을 이루게 되었다.
경내에는 80여평의 연못이 있고 정자가 있었으며 연못 가운데는 지금 종루 계단 앞에 모셔져 있는 롯치* 효용이 모셔져 있었다.
이 약사여래 모신인연은 내가 ※을 얻게 되고부터 약사여래부처님을 순하면서 모시고 싶다는 발원을 하였는데 우연히 법률사에 나오는 신도 한분이 병이 깊은 보살님 한분을 모시고 오셨는데 약사여래부처님을 조성해 모시고 싶다는 것이다.
그 뜻을 여쭤보았더니 고치기 어려운 1뿜를 얻어 일본 병원까지 가서 치료가 불가능 하다는 판정을 받고 모든 것을 포기한 후 마지막 생을 정리 중에 있었으며 법률사 약사여래 조성불사의 소식을 듣고 모든 충들을 위해 약사여래입상을 단독 조성 봉안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불사는 더욱 힘을 얻어 급속히 추진되었다.
한편 이 보살님 내외는 힘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을때 미국 유럽등 여행이나 하고 온다며 떠났다.
불상 조성이 원만히 끝나 4* 2531년 3월 1일 점안식을 하게 되어 미국 체류중인 보살님께 전화를 드렸더니 미국병원에서 검진을 해 놓고
3일후 결과를 기다린다며 점안식을 계획대로 진행하라는 당부오 감사의 인사가 있었다.
그런데 3일후 보살님으로부터 밝은 목소리로 검진 결과 아무이상이 없는데 한국에서나 일본에서의 검진결과를 이해 못하겠다며 미국 병원담당의사는 자기가 책임지겠다며 아무 걱정 없이 즐겁게 살라는 당부까지 했다는 것이었다.
이에 보살님은 모든 계획을 취소하고 점안법회에 참석하겠다는 정말 놀랍고 반가운 전화였다.
그 후 이보살님의 유도 BTIM3월) 20끗 의 제3%이 되었으며, 법률사 약사여래부처님 조성사 대시주로 16년이 지난 지금 오히려 더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지금 법률사 약사여래부처님은 조성되시면서 그 영험을 보이시고 중생의 아픔을 여래의 아픔으로 중생의 고통을 씻어 주시면서 지금도 나투고 계신다.
법사 창건 당시 약사여래부처님을 모신 연못주위로 크고 좋은 나무와 꽃들로 그 운치가 빼어나 가까운 초등학교들이 소풍을 왔다가곤 했으니 그 아름다움을 짐작하게 한다. 좋은 환경여건을 갖추고는 있었지만 염전지역의 오지에다 토지가 붉은 진흙이라 비가 오면 차가 빠져서 부천등 인근 도시로 교통이 두절되었고, 맑은 날에는 붉고 미세한 황토가루가 도량을 온통 덮어서 빨래조차 마음대로 널지 못하고 생활여건이 어렵기가 말이 아니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해 트 ⅜m Fd=토로 40여호가 인접해 있는 작은 마을이었고 도량은 마을에서 조금 떨어져 ※*! 기슭에 자리 잡고 있었다. 시흥군이 서울, 안양, 과천, 의왕등으로 편입되고 읍에서 시로 승격되기도 하여 나누어지고 겨우 남은 소래읍, 수암면, 군자면을 원년 시흥군의 거대했던 명성이나마 저 버리지 말자고 시흥이라는 이름으로 초라하게 태어난 것이 시흥시인 것이다.
카가 되면서 도시계획이 수립되었고 얼마안가 구 도시계획은 전면 폐기 되고 공영개발지구로 변경되어 오가든 사람이 없든 한적한 이곳에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인근 지역에는 시청 경찰서, 등기소등 행정타운이 세워졌다.
처음 이곳에 조그마하게 부처님을 모시고 사격을 갖추게 된 것은 서울에서 나를 도와 이곳을 구입할 수 있게 한 몇몇 보살님들의 의지처로 삼아 수행하고자 한 것이었지 큰 도량을 만들고자 함은 아니었다.
나는 지방 몇 곳의 #※호을 맡아 살았다. 그중 김천 해 #% ##소임을 볼 당시는 불교포교는 생소한 시절이어서 소를 창립하고 개#솔를 창립하니 신도들의 반대의 벽에 부딪쳐 그 어려움을 겪어 보지 않은 스님들은 모를 것이다.
법당에서 찬불가를 가르치니 부처님 앞에서 가시네 머슴아들을 모아 입을 벌려 노래를 하니 해괴하고 망측스럽다고 #보살님들의 꾸중이 대단하였다. 그때 만 해도 법당은 신성불가침의 성전이기 때문이었다.
절을 운영하자면 시주의 주체인 보살님들의 말씀은 바로 그대로 압력이었다. 이를 설득하고 또 설득하여 이겨내며 학생회, 청년회를 운영하여 포교의 첫 시도는 성공이었고 또한 김천교도소 법회도 열심히 하여 나름대로 칭송을 받아 내 마음속 깊이 포교의 꿈을 크게 키우게 되었다.
처음 이곳에 법사로 자리하게 된 것은, 그때 나는 중동을 해해 유을 모시는 해호에 근무하면서 ※ 술하를 겸직으로 4년여를 근무 하던 중 과로하였고 마음도 원치 않는 일이라 무리가 왔는지 ※※을 얻게 되었고 쉬면서 수행정진을 해 보자고 찾아 들게 된 곳이다.
총무원 근무 할 당시만 해도 이웃 안산의 신도시에 종교 부지를 얻어 포교를 하겠다고 의욕적으로 토지개발공사, 건설부등으로 뛰기도 했는데 그마져 포기하고 대신 그 인연으로 안산을 이웃한 이곳을 인연 처로 얻게 된 것이다.
이곳에 자리 잡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의 개발로 떠날 생각을 하고는 시에 들어가 공영개발지역 내에 종교부지를 문의 하니 시흥시는 그린벨트가 80%가 되고 지금 개발 지역이 좁기 때문에 부지는 없다는 답변이었다. 종교부지를 문의한 것은 종교부지가 있으면 누가해도 절을 지어 포교를 담당 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는데 종교부지가 없다고 하니 이마져 버리고 떠난다면 불교의 설자리가 없게 된 것을 알았다.
말도 못하는 불교 불모지인 이곳인데, 나에게 주어진 사명이구나 받아드리자, 그래서 떠날 것을 포기하고 그때부터 시작된 포교 일념의 발동은 나를 바쁘게 하기 시작했다. 초라하고 몇 안되는 시흥의 사찰을 돌아 다니며 스님들과 협의 하여 불기2532년 시흥불교연합회를 구성하여 초대회장을 맡아 10여년간 연임을 하며 시흥 포교에 들어간 것이다. 더불어 그때만 해도 안산에 마져 경찰서가 없어 광명경찰서의 경승으로 경찰관을 위한 법회와 유치인들을 위한 순화 교육도 아울러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시기에 신흥 도시 시흥시민을 위한 불교, 카톨릭, 기독교가 주관을 하고 각 사회단체가 협찬을 하여 도시행정, 도시계획, 도시환경 등에 전문가를 초빙하여 시민 강좌를 열기도 하였는데 나도 여기에 시흥불교연합회장으로 적극 협조하면서 체쇼※소의 역을 시흥에 실천하기도 했다.
MB금가 급속히 개발 되어 가므로 법률사의 도량은 좁아지고 포교의 공간이 불편하기 시작하여 내 업병을 접어두고 법당 및 요사의 불사가 시급함을 마음먹었지만 이 지역 불교 불모지에서는 엄두를 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다 어떤 어려움과 고충도 감내하며 시일에 얽매임 없이 뛰어보자, 우리 부처님의 큰 보살핌의 든든한 후광이 있지 않는가?" 그 용기를 가지고 동분서주 뛰기 시작했다. 어제는 울산으로 오늘은 부산에서 내일은 김천으로 그렇게 전국을 뛰어 1t호를 하기 시작 한 것이다. 나를 아껴주는 보살님들이나 도반의 만류와 우려의 눈빛을 떼지 않았지만 내 몸 추서 릴 때가 아니었다.
설사 내가 # 중에 쓰러 진다해도 1*※의 기반 조성을 해 놓아야 겠다는 일념이 나를 잘 버티게 도와주었다 여지껏 지금까지도, 처음 지니하여 어렵고 가난함 속에서 어른 스님을 모시며 배고픔을 참고 운력에 단련된 나로서는 아낌은 내 생활화가 되었다. 그 사이 내 나름데로 좀 덜 먹고 입지 않으며 인색한 나를 부끄러워 한적없이 모아 왔든 해를 털고 불사가 시작되니 14에 한층, 24에 또한층 그렇게 탑을 쌓는 마음으로 몇 년에 걸쳐 본당 건물 지하1층 지상 3층을 완공하여 3층 해에는 +#을 모시고 2층 38*은 법회전용으로,
1층은 대중 방사로 그리고 지하는 식당으로 다소의 규모를 갖추어 본존 삼존불과 ‡*과 함께 종합불사회향식을 가지니 불기 2540년 음 9월 3일이라 또한 도시 사찰의 포교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유치원불사에 원력을 세웠다.
불기2543년에 유치원을 지상2층 지하1층 260평 규모의 교실7개 원장실, 교무실, 지하대강당, 자료실, 주방 기계실을 갖추어 다음해 불기2544년 개원하였다. 법사 부설 아란 유치원은 올해로 3회의 졸업생 500여명을 배출시켰다.
유치원 건립시 지금의 이 1에 단층 록카를 신축해서 사용하다가 기초가 부실하여 기존건물을 고 기초부터 다시 1층을 건립하고 그 위에 볶을 목조5포3포의 지금 이종루를 갖추고 을 1500배, # 직경 6자, *, 2i의 4을 제작 봉안하니 명실 공히 법사가 제대로 전법도량으로서 ※을 갖추었다.
이해 불기 2548년 5월 16일(서기 2004년 음력 3월 28일)에 타종식을 하니 사바와 지옥중생의 전법도량으로서 면모를 굳건히 갖추게 된 것이다.
나무 마하 반야 바라밀
佛紀 2547H早引是 百種日0 京畿道 始興市 下中洞849番地

오시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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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시흥시 하중동 849 법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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